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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시진핑은 어떻게 중국의 황제가 되었나 - 시진핑의 거의 모든것

by OEO_oeo 2021.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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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은 어떻게 중국의 황제가 되었나 - 시진핑의 거의 모든것

 

 

시진핑은 1953년 6월 15일 베이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태어났을 때만 해도 핵 금수저를 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시중쉰은 중국 부총리까지 했을 정도로 당에서도 고위직을 맡았던 인물이었니까요. 하지만 시중쉰은 이후 반란세력으로 몰려 직위를 상실하고 시골로 추방되는데요. 이때 시진핑의 나이는 16살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시진핑은 7년간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시진핑은 이때 힘들었던 경험조차 이후 정치 활동 때 자신도 힘든 농민들의 생활을 겪어 봤다는 점을 강조하며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기도 합니다.

 

 

 

1970년대 초반, 중국에서 사람대접을 받으려면 단 한 가지 길만이 존재했습니다. 바로 공산당의 들어가는 건데요. 공산당은 중국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곳입니다. 시진핑은 공산당에 입당하려 하지만 반란 세력으로 찍힌 아버지 필터에 걸려 번번이 입단에 실패하고 마는데요. 열 번의 시도 끝에 그는 결국 공산당에 입당하게 됩니다. 이때가 1973년 그의 나이 20살 때였습니다. 하지만 시진핑이 갈 길은 여전히 멀어 보였습니다. 그는 이제 겨우 공산당 말단으로 입당하게 된 것이니까요. 참고로 현재 14억 중국 인구 중 공산당원 수만 9천만 명입니다. 공산당에 입당하는 것은 겨우 산 하나를 넘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시진핑이 9천만 명이 지탱하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시진핑도 일단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되는데요. 그가 들어간 곳은 중국 최고의 대학으로 손꼽히는 칭화대, 중국에서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동네 자랑거리가 되는 게 북경대와 칭화대 두 곳이니 역시 그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세상에 다시 한번 바뀌게 됩니다. 15년 넘게 야인 생활을 하던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오게 되는데요. 1978년, 당시 중국의 실세였던 덩샤오핑은 시중쉰을 정계도 복귀시킵니다. 마침 대학 졸업과 시기가 맞물린 시진핑은 아버지의 정계 복귀와 함께 태자당에 입당하게 되고 당의 고위직으로 올라가게 되는 찬스를 얻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태자당이라는 존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은 다른 민주주의 국가처럼 제2당이 존재하지 않고 공산당이라는 단 하나의 당만 존재하는데 시진핑이 태자당에 입당했다니 뭔가 조금 이상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태자당은 정치적 당이 아니라 파벌, 혹은 라인에 가깝습니다. 중국의 공산당 내에는 소위 3대 파벌이 존재하는데요. 3대 파벌은 이름하여 상하이방, 공청단, 그리고 태자당입니다. 먼저 상하이방은 중국 5대 주석을 맡았던 장쩌민을 축으로 하는 라인입니다. 상하이방의 영어 이름은 Shanghai Mafia.

이들 파벌의 이름이 상하이방인 것은 장쩌민의 정치적 기반이 상하이에 있었고 이후 장쩌민이 실권을 잡으면서 자신을 상하이에서 보좌했던 인물들을 고위직으로 불러들이면서 생기게 되었죠. 공청단은 공산주의 청년단의 약자입니다. 상하이 방이나 태자당이 완전한 사조직에 가까운 것과는 달리 공청단은 공산당에서 직접 싹이 있어 보이는 청년 인재풀을 뽑아 관리 및 운영하는 조직인데요. 보통 학교에서 성적 좋고 품행이 단정한 청년들은 일단 공청단에 가입시킨다고 합니다. 공청단의 대표적 인물은 6대 주석인 후진타오가 있습니다. 그리고 태자당 여긴 이름 그대로 고위 관료 자식들의 모임이에요. 영어로는 Crown Prince Party. 이름부터 금수저 냄새가 나죠? 시진핑 아버지가 정계에 복귀하면서 시진핑이 태자당에 가입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곳은 선택된 금수저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중국인 권력의 힘인 공산당에서도 금수저들만 들어갈 수 있는 태자당.

 

 

공산당의 말단이었던 시진핑은 태자당에 가입하면서 엄청난 입지를 구축하게 됩니다. 물론 태자당에 들어간다고 다 시진핑처럼 되는건 아닙니다. 시진핑은 능력도 있었어요. 대학도 중국 최고 대학으로 치는 칭화대에 들어갔고 심지어 아버지가 팽을 당한 시절인 10대에도 시골에서 청년 노동자들을 이끌면서 당시 최고 실적을 올렸을 정도로 리더십도 있었다고 해요. 당시 시진핑 정도면 중앙 관리직을 하며 편하게 일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그는 지방 관직을 거쳐 여러 곳을 돌며 실전 경험을 쌓게 됩니다. 그가 쌓아올린 시간에 공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약 30년간을 지방을 돌며 근무하던 그는 이때의 경험을 인정받아 2007년 상하이 당 위원회 서기를 맡게 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시장 같은 존재인데요. 중요한 건 다른 곳이 아니라 지역이 상하이였다는 겁니다. 상하이 당 서기를 맡게 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상하이방의 지지를 받게 됩니다. 당시 중국은 6대 주석인 후진타오 체제였고 뒤에 뒤를 이을 인물로는 현재는 중국의 2인자가 된 리커창이 유력해 보였습니다. 리커창이 후진타오와 같은 공청단 출신이기도 했고 베이징대에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기 때문인데요. 모두가 리커창이 7대 주석으로 유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때 시진핑이 30년간 차곡차곡 쌓아왔던 경험들이 하나로 모이게 됩니다.

 

중국의 2인자 리커창

 

3대 파벌 중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시골도 추방되어 살았던 경험과 지방을 돌며 일했던 경험은 시진핑이 태자당이면서도 평민 같은 이미지를 심어주게 됩니다. 심지어 그는 정치 활동하는 내내 청렴한 관리라는 이미지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상하이시 서기를 맡았을 때 외부에 갈 일이 있으면 상하이에서 관례대로 준비해 준 특별열차를 마다하고 소형버스를 타고 다니는 등 그는 중국의 고위 관료들이 부정부패 스캔들로 시끄러웠을 때도 단 한번도 부패 스캔들이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로 모아지면서 결국 그는 대세였던 리커창을 느끼고 2013년 중국의 7대 주석이 됩니다. 7대 주석이 된 시진핑 역시 푸틴처럼 자국 내에서 상당히 인기가 좋은 인물이 되는데요. 푸틴이 상남자 이미지로 러시아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면 시진핑은 온화한 이미지로 중국 인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일단 웃는 모습 하나는 친근한 옆집 아저씨 그 자체입니다. 그가 롤 모델로 삼는 삼국지의 유비가 떠오를 정도로 온화함 그 자체인데요. 거기다 부인은 국민가수 출신인 것도 그의 인기에 한몫했고요. 결정적으로 시진핑이 집권하면서 중국의 위상은 G2가 될 정도로 높아지면서 시진핑은 이코노미스트, 타임지 등에서 중국의 새로운 황제로 그려지게 됩니다.

 

 

시진핑 역시 푸틴과 같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아 이게 권력의 맛이구나. 근데 이 좋은 걸 10년밖에 못한다니... 그래서 그는 법을 바꾸기로 합니다. 어떻게? 9천만 명의 공산당원 중 끗발이 있는 2천3백여 명의 전국 대표들을 모아 추석 임기를 폐지하면 어떻겠냐는 투표를 실시하는 거였죠. 이 투표는 무기명 투표긴 했는데 가림막도 없고 자기 자리에서 투표를 한 다음 투표용지를 접지도 못하고 투표함에 넣는 매우 투명한 시스템으로 진행되었는데요. 물론 결과는 99.79%라는 압도적인 찬성률로 임기 폐지가 결정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0.21%의 안위가 걱정될 정도인데요. 임기 폐지 법안도 통과되고 시진핑의 장기 집권 체제는 아직까지는 무리 없이 이뤄질 것으로 보입니다. 2023년에 임기가 종료되는 그가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이라면 진작에 후계자를 내점하고 키워왔어야 했는데요. 현재까지도 아무런 후계자가 없습니다. 한 중국 연구소의 소장의 말을 빌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시진핑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고 그 어느 때보다 명백하다. 후계자의 이름은 바로 시진핑.'

 

국가주석 임기제한 철폐 개혁안에 투표하는 시진핑

 

하지만 최근 그는 여러 가지 논란을 겪으며 장기집권 꿈 앞에 조금씩 빨간불이 들어오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나 그의 해외적 위상은 거의 모든 나라들의 여론조사에서 극혐 수준의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을 정도입니다. 오히려 트럼프 때 중국에 엄청난 압박을 가했던 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했다'라고 말하는 쪽이 많았을 정도죠. 하지만 많은 독재자들이 그렇듯 시진핑 역시 언론 차단에 매우 능합니다. 일단 통제가 안 되는 해외 소셜 미디어는 무조건 차단입니다. 중국에서는 구글, 유튜브, 페이스북, 클럽하우스 등 모두 불가입니다. 예전 마크 저커버그가 페이스북을 중국에서 운영하고 싶어 칭화대에서 중국어로 연설을 하는 장면은 눈물겹게까지 합니다.

 

 

어쨌건 이렇게 언론의 전면 통제권을 쥐고 있는 중국에서 절대 금기 사항이 있으니 바로 시진핑의 재산 현황입니다. 특히나 청렴한 이미지로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되었고 자신의 라이벌이 될 만한 이들은 모두 부정부패로 싹을 잘라버리는 그이기에 시진핑 재산에 대한 언급을 통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보입니다. 현대판 아방궁이나 50대 이상의 비행기, 여러 대의 호화 요트 등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데 있어 맥시멀리스트인 푸틴과는 달리 시진핑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있어 매우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데요. 집은 물론이고 자동차조차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벤츠를 마다하고 자국산 브랜드인 '훙치' 리무진을 타고 다닙니다. 심지어 시진핑은 고위 간부들에게도 외국 차량을 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면서 공산당 고위 간부들은 졸지에 모두 '훙치'를 타고 다니게 되었죠. 심지어 그는 해외 순방을 나갈 때도 전용기에 '훙치' 리무진을 공수시켜 해외에서도 '훙치'를 타고 다니며 '훙치' 홍보에 열을 올렸는데요. 물론 여전히 전 세계 정상 중 '훙치'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가뭄에 콩 나듯 아주 가끔씩 시진핑의 재산에 대한 기사들이 올라오는데 물론 중국 언론에서 이런 기사가 올라오는 것은 꿈도 못 꾸고 외신에서 올라오게 되는데 이런 기사가 올라오면 그 외신은 중국에서 IP가 차단되고 특파원들의 비자는 거부됩니다. 예를 들어 시진핑의 누나와 매형이 약 4,000억 원가량의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보도한 블룸버그 통신은 기사가 나오자마자 중국에서 접속이 차단됐고 특파원들은 중국에서 쫓겨나게 됐죠. 어쨌건 시진핑은 화려한 물질의 맛보다는 권력의 맛을 중요시하는 인물입니다. 중국에서 가장 신처럼 떠받들어지는 인물이 마오쩌둥. 시진핑의 목표는 바로 그 마오쩌둥을 뛰어넘는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는 역사에 남는 중국의 새로운 황제로 등극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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