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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프가니스탄의 영웅 '아흐마드 샤 마수드: Ahmad Shah Massoud 판지시르의 사자(شیر پنجشیر)' - 소련과 싸워 이긴 남자

by OEO_oeo 2021.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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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의 영웅 아흐마드 샤 마수드: Ahmad Shah Massoud 판지시르의 사자(شیر پنجشیر) - 소련과 싸워 이긴 남자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1953년 9월 2일 출생으로 2001년 9월 9일 암살을 당해 생을 마감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주의 운동가, 군인, 군벌, 정치군사 지도자였으며 1979년에서 1989년까지 소련의 침공에 대한 저항운동을, 그 이후 사망할 때까지 탈레반에 대한 항쟁을 벌이며 뛰어난 사령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마수드는 북부 아프가니스탄 판지시르(Panjshir Valley) 출신의 타지크인(Tadzhik), 수니파 무슬림이었다.

 

1953년 9월 2일 판지시르 계곡에 있는 자갈라크에서 경찰지휘관 도스트 모하마드 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 교육과 종교 교육을 같이 받은 마수드는 특히 언어 쪽에서 상당한 재능을 발휘했는데 공용어인 다리어는 물론 프랑스어, 파슈토어와 우르두어에 유창했으며 아랍어에도 매우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로 활동하려면 쿠란을 읽기 위해 아랍어는 필수다. 1972년 카불대학 건축과에 재학하던 마수드는 부르하누딘 라바니가 지도자로 있는 이슬람 사회(Jamiat Islami)의 학생 조직인 무슬림 소년 단체(sazman-i jawanan-i musalman)와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다.

 

 

부르하누딘 라바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근본주의, 반공주의 운동에 관여하게 되었으나, 이후 파벌 분화 때 라바니와 함께 온건파가 되었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자 고향인 판지시르 계곡에서 무자헤딘을 이끌고 무장 투쟁을 했다. 반군 지도자로 활약하여 "판지시르의 사자"(شیر پنجشیر)라는 별명을 얻었다. 소련과 맞서 싸우며 아프가니스탄의 발전을 도모하였던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지도자 겸 군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국민에게는 영웅과 같은 존재이다. 덕분인지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의 구국의 영웅 대접을 받고있다. 참고로 이른바 '페샤와르 세븐'이라 칭해지는 아프가니스탄 저항운동의 지도자들 중 유일한 타지크족 출신이다. 마수드는 생전에 자기가 죽으면 미국에 뭔가 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2001년 9월 9일, 벨기에 여권을 소지한 서방 기자들이 마수드를 취재하러 왔는데 그들을 응대하던 마수드는 기자들로 위장한 알 카에다 소속 자폭테러범들에게 암살당했다. 기자들은 스스로 모로코 혈통의 벨기에인이라고 소개했지만 실은 튀니지 국적의 테러범들이었다. 이때 마수드의 나이는 48세. 그리고 그의 예언대로 이틀 후 9.11 테러가 벌어졌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를 내놓으라고 탈레반에게 요구했으나 자신들의 숙적인 마수드를 제거해준 알 카에다를 탈레반 정권이 내놓지 않았고 결과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었다. 그의 죽음에 수많은 아프간인들이 슬퍼했다.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된 후 마수드는 국가의 영웅으로 선포되었고 기일인 9월 9일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국가기념일이기도 하다.

'판지시르의 사자' 등의 별명으로 불렸으며 말 그대로 전설이나 다름없는 게릴라 지도자였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시기에는 타지크족이라는 특성상 미국의 지원을 거의 못 받는 상황에서도 가장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 게릴라전과 무력 투쟁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그가 역사적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는 것은 무고한 양민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만큼은 철저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약자에게는 명분이 무기이며, 그리고 그 명분이 이슬람의 진정한 전통이라고 생각한 마수드는 평생 동안 거친 사막과 먼지바람 부는 산악을 떠돌며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결코 테러리즘의 유혹에는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카불을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탈레반의 협박에 카불 근처까지 진군한 마수드가 무고한 주민의 생명을 해칠 수는 없다며 판지시르로 철수한 경우가 있었다.

 


진정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답게 저항하지 않는 자, 아이, 여성들에게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 또한 다른 사상에도 관용적이었다. 수피즘 관련 책을 항상 가지고 다녔으며, 유대인 프린스턴 교수 마이클 베리(Micheal Berry)의 증언에 따르면 마수드는 유대인과 크리스천을 같은 신을 믿는 형제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교리에 호기심을 보였다고 한다.

한국군 소속으로 유엔 평화유지군 고문단에 참가하여 아프가니스탄에 간 적이 있는 채수문 중령의 저서에 의하면, 마수드는 한국 인삼을 좋아했고 여성들에게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며 여성의 권리에도 상당히 관심을 기울이는 등 탈레반과 정반대 정책을 취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학교 등의 건설. 여성 인력 또한 아프간의 재건에 필요하다 여겨 여성 교육에 신경을 썼다.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여성 외교관인 체케바 하체미는 마수드 아내의 친구이기도 하다. 탈레반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이슬람교 종파의 교리와 그 교리를 따르는 신자들이 여성들에게 얼마나 잔혹한지를 생각하면 의미하는 바가 크다.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는 거의 한국의 이순신처럼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거기다 아프가니스탄인이지만 출신 민족이 타지크족이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의 이웃나라이자 한때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치뤘던 소련의 일원에 속해 있다가 소련해체로 독립한 타지크족의 국가인 타지키스탄에서도 러시아 침략자에 맞서 싸운 민족의 영웅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물론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중에는 그가 수니파라는 이유로 무슬림이 아닌 이교도라고 주장하는 관심종자들도 있는 편이다.

 

2021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이 붕괴하고 이스마일 칸, 압둘 라시드 도스툼, 아슈라프 가니, 하미드 카르자이 등등이 목숨과 돈에 급급해서 볼썽사납게 타국으로 도망가거나 항복하는 상황에서도 아들 아흐마드 마수드는 과거 자신의 아버지의 부하였던 암룰라 살레와 함께 용감하게 반 탈레반 저항군을 이끌고 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해외에서 아버지 후광만으로 편하게 사는 대신에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희망을 위해 목숨걸고 용감하게 나선 그의 모습이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우려하는 많은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현재 그의 아들과 암룰라 살레가 지휘하는 아프가니스탄 국민 저항 전선은 전 세계 각지에서 응원을 받는 상황이다.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그의 아들 아흐마드 마수드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아들 아흐마드 마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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